소방

다른 나라의 방화복은 어떨까?

Dr.risk 2020. 3. 27. 11:33

소방관들의 해외 연수가 보편화되면서 우리나라 소방관들도 해외 소방관서를 경험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같이 훈련하거나 소방관서를 방문하면 현지에서 사용하는 개인보호장비를 착용해보는데 종종 국내에서 사용하던 장비와는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방화복의 경우 우리 것보다 가볍거나 무겁거나, 착용감이 좋거나 나쁘거나, 아니면 방화복에 포함되는 각종 편의 장비들이 같거나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어디가 어떻게 다르고 왜 이런 차이들이 있는 걸까?

 

통상 방화복은 유럽형과 북미형으로 나뉘는데 이 두 대륙이 갖고 있는 방화복 표준이 그 이유다.

 

유럽은 EN 469 표준에 부합하는 방화복을 사용하고 북미는 NFPA 1971 표준에 부합하는 방화복을 준용한다. 표준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표준들이 가진 틀에 따라 두 대륙 방화복의 경향성이 대략 결정되기 때문이다.

 

호주와 뉴질랜드가 자체 표준(AS/NZS 4967)을 운영하는 것과 우리나라가 소방청 표준규격을 운영하는 것을 제외하면 위에 언급된 표준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걸 여러 국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 소방과 대만의 여러 소방본부는 EN 469에 부합하는 방화복을 구매한다. 반면 남미 국가들은 NFPA 1971 인증을 구매단계에서부터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현장 활동을 하는 소방관들이 이런 표준이 과연 어떻게 생겨났고 또 누가 만들었는지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당연한 말이지만 방화복 표준 역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표준을 만드는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

 

 

EN 469와 NFPA 1971은 이 ‘사람’의 측면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통상 기술위원회(technical committee) 또는 이와 유사한 명칭의 조직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표준의 제ㆍ개정을 담당하는데 NFPA 기술위원회의 경우 현재 33명 중 14명이 소방그룹(사용자-소방관, 구매자-구매담당, 노조)으로 구성된다.

 

이런 구조는 자칫 제조사나 연구기관 주도로 진행될 수 있는 제ㆍ개정 작업에 소방관들의 의견이 더 반영될 수 있도록 하거나 더 많은 부분이 현장의 관점에서 검토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표준을 논하면서 한가지 유의할 점은 각 표준에서 요구하는 난연성과 방수, 열 방호 성능 등 성능요건이 ‘최소 요건’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각 표준을 충족시키는 범위 내에서 매우 다양한 종류의 방화복이 나올 수 있으며 이러한 다양성은 각 국가 또는 지역 소방의 전통, 소방관의 요구 사항, 기후, 소방활동 방식과 전술 차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가령 같은 EN 469 인증이라도 영국 런던 소방관이 착용하는 방화복과 독일 베를린 소방관이 착용하는 방화복은 형태가 매우 다르다. 영국 소방에서 사용하는 방화복은 구조가 단순한 경우가 많다. 주머니도 많거나 크지 않다. 한때 유럽에서 많은 소방본부가 채택했던 drag rescue device도, 자기 탈출용 가슴 끈도 없다. 이 모든 게 불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반면 베를린 소방본부의 방화복은 자기 탈출용 가슴 끈과 drag rescue device가 달려있다. 소방본부에서 이를 요구했거나 적어도 선정과정에서 현장의 선호도가 반영된 결과다.

 

통상적으로 북미 방화복은 유럽 방화복에 비해 무거운 편이다. 이유는 NFPA 1971의 열 방호성능 요건이 EN 469에 비해 높기 때문이다. 높은 열 방호성능을 내기 위해서는 방화복의 안감이 더 두껍고 무거워져야 한다.

 

유럽에서 많이 사용되는 안감은 1㎡당 200g 안팎의 무게를 보이는 데 반해 북미에서 사용되는 안감은 평균적으로 1㎡당 270g 안팎의 무게를 보인다. EN 469의 경우 열 방호성능은 NFPA 1971에 비해 낮지만 열 손실(heat loss)에 대해서는 더 높은 요건을 갖고 있다.

 

따라서 유럽의 방화복들은 두껍고 무거워지는데 더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유럽의 모든 방화복이 가볍고 낮은 열 방호성능을 갖는 건 아니다.

 

헤르체고비나 수도인 사라예보의 소방본부가 최근 소방관들에게 지급한 방화복은 평균적으로 3kg 초반대의 무게를 갖고 있다. 이는 우리가 과거 사용했던 일반(검은색) 방화복 무게와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아일랜드 수도인 더블린 소방본부는 매우 높은 수준의 열 방호성능을 요구했다. 그 결과 유럽에서 가장 무거운 4kg 대의 방화복을 착용한다. 현재 우리나라 소방관들이 착용하고 있는 특수방화복보다도 조금 더 무거운 편이다.

 

 

이마저도 북미의 방화복에 비하면 가볍다. 뉴욕 소방본부(FDNY)의 방화복은 무게가 5kg이 넘는다. 안감부터 무게 차이가 나고 겉감도 차이가 난다.

 

북미에서는 좀 더 질기고 강한 겉감 원단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필연적으로 겉감의 무게 상승을 수반한다. 북미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PBI 겉감 원단은 1㎡당 245g의 무게를 갖는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PBI 겉감 원단은 이보다 조금 가벼운 1㎡당 205g이다.

 

하지만 북미에서도 무겁고 두꺼운 겉감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마이애미-데이드 소방본부의 경우 205g짜리 겉감을 선택했는데 이는 관할지역의 무더운 기후를 고려한 것이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방화복이 북미 방화복인지 유럽 방화복인지 예상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반사 테이프의 폭을 보는 방법이다. 북미 방화복들은 3인치(7.62cm) 반사 테이프를 많이 사용하지만 유럽 방화복들은 2인치(5.08cm) 테이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내피 탈착 가능 여부다. 북미의 방화복은 우리나라 특수방화복과 같이 내ㆍ외피 분리형이 많지만 유럽의 경우 내ㆍ외피 일체형이 많다. 홍콩이나 대만에서 사용되는 EN 469 인증 방화복은 비록 유럽 스타일을 따르지만 내ㆍ외피 분리형이다. 내ㆍ외피 분리형 방화복의 경우 세탁과 관리가 더 용이하다는 게 장점이다.

 

 

세 번째 방법은 만약 상의 앞쪽을 닫아 고정하는 방식이 지퍼가 아니라 hook-and-dee라면 그 방화복은 북미 방화복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EN 469나 NFPA 1971은 표준이며 방화복 구매에 나서는 각 소방본부는 이를 기준으로 대개 자신들만의 요구사항을 규격서에 추가한다. 북미에서는 소방본부의 재량이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데 ‘특정 원단이나 구성품을 사용한 제품만을 구매 대상으로 고려하겠다’고 명시하는 경우도 있다.

 

북미 방화복 제조사들의 카탈로그는 여러 개의 모델과 수많은 옵션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반사 테이프의 위치와 크기, 주머니의 위치와 크기, 각종 고리와 편의 장치들은 소방본부 재량에 따라 선택된다.

 

따라서 본부별로 방화복 디자인이 다른 것은 매우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같은 이유로 유럽에서도 소방본부별로 다른 방화복을 착용하는 경우가 많다.

 

북미 방화복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덧붙이자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drag rescue device는 여전히 의무화 돼 있다. 그 때문에 목 뒷부분에 이 장치가 있다면 그 방화복은 북미 제품일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커다란 주머니들인데 이는 소방본부가 개인 탈출 장비나 현장에서 필요한 소도구 보관용으로 규격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론을 짓자면, 북미 방화복은 유럽 방화복보다 조금 더 크고, 무겁고, 주머니가 큰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반적인 경향이지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럽과 북미 사이 어느 지점에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많은 부분에서 북미 방화복에 가까운 모습이다. 내ㆍ외피 분리형을 택하고 있는 점, 그리고 3인치 반사 테이프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설계 상 북미 방화복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결론이 조금 시시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어느 지역의 방화복이 더 나은지’가 아니다. 세상에 완벽한 방화복 또는 최고의 방화복은 없다. 각 소방본부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조건들을 찾아 구매하는 과정에서 제각기 맞는 방화복이 나오는 것뿐이다.

 

소방본부의 선호와 선택 그 자체가 제조사에는 제품 개선 방향의 신호가 된다. 소방본부와 제조사 간 지속적인 피드백은 더 좋은 방화복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하고 업계 발전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우리나라도 방화복 선택에 있어 유럽이나 북미와 같이 소방본부에서 재량을 행사할 수 있을까? 지난해 말 제정된 소방장비관리법을 보면 이러한 재량권의 행사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방본부가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주어진 제품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기존 방식이 아니라 원하는 제품과 옵션을 규격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과연 곧 더 나은 방화복을 향한 소방본부들과 제조사들의 경쟁을 볼 수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