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백리(一百里) 행군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갑자기 왠 행군이냐고요? 제 생각도 딱! 그랬습니다. ‘직원 소양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날아든 날벼락에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지요. 군대에 다녀온 남자라면 알겠지만 백리, 즉 40km 행군이라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더군다나 돌도 씹어먹고, 버스보다 빠르게 뛰어다니던 20대초반의 몸도 아니고 보니 살짝 겁도 났습니다. 물론 별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가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별 소용이 없더군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참가한 교육에서 긍정의 에너지가 솟구치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지요. 아마 다들 비슷한 마음이었나 봅니다. 버스를 타고 교육 장소로 이동하는 내내 동료들의 입에서 불만의 소리가 끝도 없이 터져 나왔으니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릴게요. 마음 편지에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반쯤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저녁 7시에 오대산 휴게소를 출발했는데, 아침 6시가 가까워서야 하조대에 도착했습니다. 11시간 동안 산속을 헤매고 다닌 셈이지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도 아니어서 처음 몇 시간은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정을 넘기면서부터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통증과 졸음이 기묘하게 겹쳐서 달려들었습니다. 무릎과 발목 그리고 발바닥에서는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는데, 신기하게도 순간순간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한 걸음씩 내딛는 것도 힘에 겨웠습니다. 묵직한 모래 주머니라도 달린 듯 다리를 끌어올리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함께 걷는 동료들도 모두 비슷한 느낌이었겠지요. 맹렬하게 불만을 토로하던 동료들의 목소리도 어느새 새벽의 정적 속에 묻혀버렸습니다.
앞선 동료의 등에 매달린 채 흔들리는 야광봉이 최면술사의 회중시계처럼 의식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휙 쳐들자 하늘 가득 빛나고 있는 별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제가 아주 멋진 경험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육체의 고통이 한계에 도달한 상황에서 정신이 또렷하게 맑아지는 그 기분은 바로 ‘뽕맛’이었습니다. 쏟아지는 별빛 아래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속을 걷는 쾌감은 고통을 감수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고통이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마음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살다 보면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 중에는 뜬금없이 찾아오는 작은 불운들도 있지요. 그럴 때 우리는 그 일이 벌어진 이유를 먼저 따지게 됩니다.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원망부터 하는 거지요. 아무런 예고 없이 날아든 교육 명령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았던 저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정작 벌어진 그 일 자체에는 충분히 신경을 쓰지 못합니다. 상황과 사실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멋진 경험이었으면 한번 더 가는 건 어떠냐고 동료들이 묻네요. 빠질 것처럼 흔들리는 발톱이 다 낳으면 그 때 천천히 생각해보겠습니다. 백리 행군의 여독과 함께 그 새벽의 별빛이 선합니다. 힘차게 또 한 주를 시작합니다.
*** 알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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