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재난으로 통신과 전기, 교통 등 사회 기간망이 초토화된 피해지역에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기는 어렵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 해외긴급구호대(국제구조대)는 지난 수년간 UN OCHA1) 산하 INSARAG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훈련하고 우리에게 맞는 체계를 구축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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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터넷 기반의 VOSOCC 시스템을 운용해 먼저 입국한 다른 나라 구조대와 정보를 교환하거나 UCC, SCC 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최초 피해국에 입국한 Heavy 등급을 보유한 구조팀은 공항 관계자와 협조해 공항 내 RDC를 설치해야 한다. 그리고 입국하는 구조팀의 신속한 입국 수속을 지원하면서 LEMA2) 회의를 통해 수집된 최신 정보를 구조팀에게 공유해야 한다.
구조팀별 UCC와 UNDAC3) 교육을 이수한 대원은 할당받은 UCC로 이동해 연락관 임무를 수행하며 해당 구조팀 운영에 관한 사항과 UN 지침 등을 공유한다.
가지안테프 공항에 최초 입국한 Heavy 등급은 프랑스 구조팀이었다. 곧이어 대한민국 구조팀이 도착했다. 프랑스 구조팀이 RDC를 개소하고 가지안테프 공항으로 들어오는 구조팀의 신속한 입국과 최신 정보를 제공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도 공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우린 골든타임 내 피해지역에 도착해 인명을 구조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지역을 잘 알만한 대사관 측과 협의한 후 피해지역으로 이동했다(당시 상황으로는 프랑스가 RDC를 개소할지, LEMA 회의가 개최될지 불확실했다).
대형 재난 초기에는 정부의 대응 시스템이 잘 작동되기 어렵다. 튀르키예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모든 게 불확실했다. 앞으로 해외긴급구호대에 닥칠 상황에 대해선 자체적으로 의사결정 한 후 대응해야 했다.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의지할 건 튀르키예 지리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대사관 관계자뿐이었다. 급하게 파견되면서 튀르키예의 문화와 상식적인 내용도 숙지하지 못한 게 걱정됐지만 지금은 그런 내용을 알아갈 시간이 없었다. 오로지 인명구조에만 집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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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대사관에 파견된 해군 국방무관의 차량을 따라 가지안테프 공항에서 서쪽으로 194㎞ 떨어진 하타이주 이스켄데룬으로 방향을 잡았다.
간간이 통신이 가능한 곳에서 구글맵으로 확인하니 이스켄데룬까지는 2시간 41분이 소요됐다. 하지만 지진으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시간이 더 소요될 것 같았다.
버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한국의 시골 동네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대부분이 광활한 평야에 농사를 경작했다. 어떤 종류의 과실나무인지 모르겠지만 과수원이 많았다.
높지 않은 산에는 양들이 먹이를 찾아 돌아다녔다. 평화로운 이곳에 지진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니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버스로 한 시간을 달려 휴게소에 도착했다. 작은 동네 휴게소에 동양인 120명이 나타나니 동네 구경거리가 됐다. ‘아마도 현지인끼리 “주황색 옷과 군복을 입고 온 이들은 누구야, 생김새는 동양인 같은데, 왜 왔지”라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휴게소 1층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와 2층을 유심히 보니 레스토랑 간판 아래 창문 유리가 깨져 있고 외벽은 갈라져 있었다.
아직 지진의 피해지역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린 지진의 진앙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무너진 건물을 볼 순 없었지만 지진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버스가 출발할 때 창밖을 바라보니 휴게소 끝자락 공터에 가족 단위로 텐트를 설치하고 숙영하는 사람들과 막 텐트를 설치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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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집이 무너졌거나 여진에 대한 공포로 공터에 텐트를 설치하고 생활하는 것처럼 보였다. 튀르키예는 지중해 기후를 가진 나라답게 겨울임에도 버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따가웠다. 도로 주변 높은 산맥 정상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높고 웅장한 산맥은 지진에 미동이라도 있었을지 궁금했다.
이스켄데룬에 가까워질수록 직접 눈으로 지진 피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무너진 건물과 갈라진 외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동 중 버스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출렁하는 가슴을 안고 창밖을 보면 도로가 갈라져 있거나 홀이 생겨 모든 차량이 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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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마을 입구 도롯가에는 음식과 물, 보급품 등을 나눠주는 보급 차량이 서 있었다. 그 옆으로 손을 벌려 무언가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달라고 소리치는 사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뒤섞여 있었다.
순간 ‘블랙호크다운’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소말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도입부에서 보급 차량이 도착하자 식량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다.
처음에는 통제된 배급이 가능했지만 나중엔 통제력을 잃어 폭동이 일어나고 군인들이 총을 난사하며 진압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이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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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튀르키예 정부 소속의 보급 차량에는 군인도, 총을 든 사람도 없었다. 지진 피해는 있지만 사회 안전망과 정부의 통제가 잘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월 9일 오후 12시 57분 현재까지 입국한 구조팀은 31개국, 추가 입국 예정팀인 구조팀이 26개국이라는 메시지가 공유됐다. 우리가 빨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많은 나라의 구조팀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31개 구조팀은 가지안테프에서 남서쪽으로 62㎞ 떨어진 진앙지 인근에서 활동 중이었다.
이어 “The main USAR Coordination Cell(UCC) will be set up in Hatay”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인 UCC가 하타이라는 지역에 설치될 거란 내용인데 하타이주는 규모 7.8 지진의 진앙지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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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구조조정센터(UCC) 하부에 4개의 섹터조정센터(SCC)가 구성됐다. SCC1_Adiyaman(아디야만), SCC2_Kahrammanmaras(카라만마라슈), SCC3_Malatya(말라티야), SCC4_Gaziantep(가지안테프)다. 피해 상황에 따라 SCC는 추가로 설치될 수 있다. 우리가 철수할 시점에는 SCC5가 추가로 구성됐다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2월 9일 오후 3시 40분께 대한민국 해외긴급구호대는 이스켄데룬에 진입했다. 하타이주 최대도시이자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로 인구 약 25만명이 거주하는 곳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가장 빠른 파병을 결정해 준 튀르키예 정예군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이곳 이스켄데룬에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아주 뜻깊은 장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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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높은 산맥의 낮은 허리 부분을 넘자 눈 앞에 펼쳐진 건 푸른 바다였다. 순간 여행을 온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구급차 사이렌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우리나라 구급차보다 높은 데시벨의 사이렌 소리와 파란색 빛을 발산하는 경광등은 대원들을 더 긴장케 했다.
버스는 점점 도시와 가까워지며 숙영지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우리가 지도에서 선정한 숙영지에 도착하니 레미콘 공장이었다. 모두 ‘이곳에서 어떻게 숙영을 하지?’라는 의문에 휩싸였다(모두가 이곳을 숙영지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도착하자마자 상황판단 회의가 시작됐다. 버스에서 대기하다 레미콘 공장의 화장실을 이용했다. 이용 중에 우리를 보고 있던 할아버지께서 차를 내어주겠다고 다가오셨다. 우린 “No, Thank You”로 사양했지만 영어를 모르시니 거절의 의사임을 모르고 계속 주겠다고 하셨다. 난처한 상황에서 정중한 거절을 고민하던 중 주변에 놀고 있던 소녀들이 신기한 듯 몰려와 통역을 해주겠다고 했다.
“우리 가족 120명이 저 버스에 있어.
모두에게 줄 수 있다면 차를 마시고 갈게”
소녀는 할아버지에게 튀르키예어로 우리 의사를 전달했다. 통역을 전해 들은 할아버지께선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어 안 되겠다고 하셨다. 묵례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돌아서면서 이방인을 따뜻하게 맞아 주시는 할아버지를 보니 우리나라와 정서적 공감대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휴식 후 버스는 다시 이동을 시작해 이스켄데룬 도시로 진입했다. 도시는 지진의 피해로 아수라장이었다. 도시가 가진 기능이 모두 상실됐다. 무너진 건물이 도로를 덮쳐 차량이 진입할 수 없었다.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트를 설치한 곳도 많았다.
길을 찾아 도시로 들어가면 갈수록 버스와 트럭은 블랙홀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튀르키예 운전기사들의 능숙한 운전으로 몇 번의 위기를 잘 넘기며 목적지로 이동했다.
도로 사정상 더 이동하는 건 시간만 낭비될 뿐이었다. 그래서 버스를 한적한 시내 공터에 주차하고 대사관 관계자와 운영반 대원들이 모여 선발대를 편성했다.
선발대는 이스켄데룬에 있는 정부 기관을 방문해 대한민국 해외긴급구호대가 도착했고 도와줄 준비가 돼 있다는 의사를 전달한 후 숙영지를 잡을 생각이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버스에서 선발대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 건물에서는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무너진 건물에는 중장비가 투입돼 철거를 시작하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은 건물들의 외벽은 여기저기가 갈라져 있었다. 창문은 깨져 사라진 곳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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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잔디 마당 위 레몬 나무에는 레몬이 가득 달려 있었다. 튀르키예 지진의 아픔과 슬픔을 모른척하며 자신만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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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피해자가 있는지 주변을 살피던 중 튀르키예 청년 한 명이 다가왔다. 튀르키예어로 무슨 말을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묻자 “No”라는 말만 했다. 대원들이 계속 영어로 말을 걸자 “Sister”라는 단어를 말했다. 이어 손가락으로 철거 중인 건물을 가리키며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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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누이가 무너진 건물에서 나오지 못해 도와달라는 것 같았다. 이미 수색이 종료돼 철거 중인 건물이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청년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청년은 눈물을 닦으며 우리에게 인사하고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튀르키예 도착 후 첫 번째로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장비가 준비되지 않았을뿐더러 철거를 중지시킬 권한도 없었다. 무엇보다 현지 구조대에서 수색한 후 생존자가 없다는 판단하에 철거가 시작됐을 거기 때문이다.
철거 중인 건물 옆에는 붉은색 옷을 입은 구조대원들이 보였다. 철거 중에 생존자가 발견될 수도 있으니 대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2월 9일 오후 4시 40분께 선발대가 답을 갖고 복귀했다.
“이곳에는 이미 다른 나라 구조대가 많이 들어와 재난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어
여기보다 더 피해가 심각한 안타키아 지역으로 가 달라”
이스켄데룬 지역 정부 기관의 요청이었다.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과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화가 났다. 대원들의 불만이 이어졌지만 한편으론 명확한 목적지가 생긴 것에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더 이상의 지체는 우릴 더 힘들게 할 뿐이었다. 버스와 트럭은 좁은 골목길을 통과해 큰 도로를 따라 빠르게 안타키아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대원들의 눈빛에는 초조함이 감돌았다. 버스 안에는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조금만 버티고 기다려 달라’는 대원들의 간절한 기도가 느껴졌다.
1) Office for the Coordination of Humanitarian Affairs, 유엔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
2) Local Emergency Management Authority, 피해국 지역현장본부
3) UN Disaster Assessment and Coordination, 유엔 재난평가조정단
중앙119구조본부_ 김상호 : sdt197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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