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k

토종박사의 좌충우돌 미국 교수 생활

Dr.risk 2014. 5. 30. 20:02

 토종박사의 좌충우돌 미국 교수 생활
학생들의 질문을 잘 못 알아 들을 때
‘국내에서 공부를 하셨는데도 영어를 잘 하시나봐요?’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물론,
내가 영어로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분들이 의례 짐작으로 하는 말씀이다. 아, 그
러나 실상은… 영어를 잘 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미 바꾸기를 포기해 버린, 절대로
꼬부라지지 않는, 구수한 한국어 억양의 영어 소유자.(초등학교 1학년인 우리 딸이 나의
영어 발음을 참 못 마땅해 한다.) 후배들로 부터도 가끔씩 ‘전 영어가 문제라서 미국 대
학에 지원하는 것은 생각도 안 해요’라는 얘기를 듣는다. 나도 전에 같은 생각이었고,
지금도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의사소통에 문제가 많을 때가 참 많다.

가장 심각한 것이, 그리고 임용된 이후 첫 강의를 할 때, 가장 걱정하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학생들이 하는 질문을 못 알아 들으면 어쩌지?’ 였다. 내가 수업 시간에 할 말
이야 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미리 준비한 대로 하겠는데, 학부생들은 보통 말하는 속도
가 참 빠르고, 교수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이든 궁하면 통하는 법. 수업 중에 학생들의 질문을 못 알아들었을 때, 내
가 쓰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반응1) “뭐라고? 좀 더 크게 말해 줄래요?”
이러면, 질문한 학생이 다시 질문을 반복한다. 그럼, 두 번째 들으면서 무슨 말인지 알아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건 마치, 내가 못 알아 들은 이유가, 나의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이 아니고, 질문한 학생의 목소리가 작아서 그런 척 하는 것이다. 특히, 대형 강의실
인 경우 좋은 핑계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 들어도 무슨 질문인지 모르겠는 경우
다. 그 때는 아래의 반응2를 사용한다.

반응2) “지금 저 학생이 뭐라고 질문하는 거지요?”
강의실 맨 앞 줄에 앉은 학생, 특히 알아 듣기 쉽게 말을 또박 또박 하는 학생에게 지금
저 학생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를 물어본다. 여전히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리는 척 하
면서... 이건 마치 영어를 영어로 통역을 하는 것인데, 통역학생(?)을 잘 고르면 아주 효
과적이다.

그래도, 가끔 아예 모르는 단어가 있어서 못 알아 듣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챙피하
게 생각하지 말고 그 단어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간단한 수
식을 써서 설명을 하고 있는데, 학생 한 명이 "그거
‘포일(foil)’해야 하는 것 아니에
요?" 라고 묻는다. Foil? 무슨 말이지? 그래서, “‘포일’을 해야하냐니 그게 무슨 뜻이
지?”라고 했더니, 많은 학생들이 약간 당황한 기색이다. 그 때, 다른 한 학생이 ‘그 수
식을 expand하는 거요’라고 말한다. 결국 (a + b) (c + d)의 형태를 ac + ad + bc + bd
로 풀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찾아보니 그 학생이 말한 FOIL
은 First, Outer, Inner, Last 의 줄임말이었고, 나는 이것을 동사로 사용하는 것을 그
때 처음 들어봤다. 중학교 (혹은 초등학교) 수학시간에 배우는 말인데, 교수가 무슨 말인
지 모르니 학생들로서는 당황할 수 밖에…

하지만, 매 학기 말에 ‘강의 평가’ 결과를 받아볼 때마다, 나의 영어에 대한 불만이 아
주 없지는 않지만, 생각만큼 많지는 않다. 오히려, 강의 내용이 재미있었고,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는 코멘트가 꽤 있다. (아내는 내가 학생들에게 맛있는 거 사주고 청탁
한 게 아니냐고 의심한다.) 나는 학생들의 너그러움(?)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한편 당연하다. 한국에서도 외국인 교수가 비록 어설픈 우리말이지만, 내용
이 좋은 강의를 해 주면, 고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나도 예전에 학생일 때, 수업 시간
에 앉아 있으면, 교수님이 얼마나 수업에 열정적이시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준비하셨는지
저절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언어 장벽을 넘어서, 교수와 제자 사이에 진심은 통한다. 결
국 말의 유창함 보다는 내용의 충실함이 중요하다.

요새 한국의 대학에서도 영어 수업을 필수로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뭐, 국제화라는
명분이라는데... 글쎄 ‘교육’의 측면에서 생각해 봤을 때, 과연 좋는 방법인지는 잘 모
르겠다. 뭐, 아무튼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학이든 한국의 대학이든 어차피 다 영어로 강
의한다면, 영어에 대한 고민은 피해갈 수 없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