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

이천 물류센터 화재 한 달… 파악된 문제와 대책은

Dr.risk 2020. 6. 10. 16:23

▲ 지난달 21일 국무조정실 주재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는 범정부 화재안전 대책이 보고됐다.© 국무조정실


지난 4월 29일 38명의 목숨을 앗아간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신축공사장 화재’가 발생한 지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예기치 못한 화재로 세상과 등진 피해자들은 모두 건설현장에 투입된 인부였다.


경찰과 소방 등 관계기관은 화재 직후인 4월 30일부터 5월 1일, 6일, 12일 등 네 차례 합동 감식을 마치고 공사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추가 조사를 진행 중이다.


화재에 취약한 ‘공사현장’과 ‘냉동창고’라는 두 가지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에서 나타나면서 결국 안타까운 생명을 앗아간 최악의 화재 참사로 기록됐다. 화재 직후 급격하게 확산된 불과 인명피해 원인을 두고 수많은 언론 보도와 분석이 이어졌다. 아직 정확한 화재 원인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피해를 키운 요인은 몇 가지로 압축되고 있다.


가연성 건축자재 사용과 방치된 위험작업 그리고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은 안전규정, 부실했던 건설현장의 안전관리와 감독, 대형 화재사고 때마다 제대로 강화되지 못한 사업주의 책임 등은 주요 문제로 지적된다.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는 걸 의미한다. 건축자재 규제를 맡고 있는 국토교통부와 노동현장의 안전 정책을 담당하는 고용노동부, 화재안전 규정을 담당하는 소방청 등 관계부처가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할지 주목되는 이유다.


정부는 유사 사고를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지난달 21일에는 국무조정실 주재로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선 이천 물류센터 화재 이후 관계부처가 합동으로 마련한 ‘건설현장 화재안전 강화 추진 방향’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국토교통부와 고용노동부, 소방청 등은 각각 마련한 대책을 제시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이천 물류센터 신축공사장 화재’ 당시 연소확대 이유와 피해 확산 요인, 범정부 차원에서 구상하고 있는 관련 대책을 살펴봤다.

 

지하 2층 불길 뒤덮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0초’
소방과 경찰의 조사결과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화재 당시 불은 연기 발생에서부터 화염 확산까지 채 20초도 걸리지 않았다. 실제 지하 2층 문 앞에 서 있던 우레탄폼 발포혼합 차량의 블랙박스에는 상상 못 할 속도로 빠르게 확산된 화재의 형상이 고스란히 담겼다.

 

 

▲ 왼쪽은 오후 1시 36분 8초께 공사장 관계자가 다급하게 뛰어 나와 119에 신고를 하라고 소리치고 있다. 오른쪽은 불길이 지하 2층 내부를 뒤덮고 있는 사진. 불이 번지는 데 불과 29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소방청 국회 제출 보고서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의원(서울 서대문구을)실에 제출된 당시 블랙박스 영상을 보면 4월 29일 오후 1시 36분 8초께 공사현장의 인부로 보이는 한 사람은 “119 불러”라고 소리치며 화면에 처음 등장했다. 16초 이후인 36분 24초께 창고 내부 뒤 천장에선 무서운 속도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한다. 한 층 전체를 시뻘건 불길과 유독가스로 뒤덮는 시간은 불과 20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관계기관은 당시 우레탄폼 발포작업과 도장 작업 등 공사 시 발생한 유증기가 불상의 원인에 의해 착화가 이뤄지면서 급격하게 확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용노동부 조사자료에 따르면 물류창고 지하 2층에서는 갈바륨 작업에 7명, 냉매 배관에 2명, 화물용 엘리베이터 설치에 3명이 투입돼 총 12명이 일하고 있었다.

 

바로 위층이었던 지하 1층과 지상 1층에선 우레탄 뿜칠과 미장 등의 공사가 진행됐던 걸 고려할 때 우레탄폼과 도장 작업 시 사용되는 시너 등 희석제 사용 과정에서 발생한 유증기가 미상의 점화원에 의해 폭발과 동시에 불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 (왼쪽부터)지하2층~지하1층, 지상3층~지상4층 모습 ©소방청 국회 제출 보고서


당시 화재는 상부층에서 일하던 인부들에게 더 큰 피해를 줬다. 각 층에 부재한 방화구획이 문제로 지목된다. 실제 사고가 난 물류센터 건물은 두 개 층 단위가 하나의 창고 공간으로 건축된 구조를 띠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복층 구조와 비슷한 형태다.


지하 2층과 1층, 지상 1층과 지상 2층, 지상 3층과 지상 4층이 각각 하나의 공간으로 건축돼 있었다. 아래층에서 시작된 화재는 빠른 불길과 시커먼 유독가스를 만들었고 굴뚝효과로 순식간에 상부층을 치고 올라갔다. 소방에 따르면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 구조물의 약 80%가 개방된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하 2층서 시작된 불, 2층에 사망자가 많았던 이유
지하 2층과 지상 4층 구조를 가진 물류센터 건물의 지상 2층에서 18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유독 2층에서 많은 사람이 숨졌던 이유는 뭘까.

 

 

▲ 1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지상 2층 모습 ©소방청 국회 제출 보고서


당시 지상 2층에는 양쪽으로 출입구와 계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건축 구조물에서 피난 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양방향 피난로가 확보돼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화재 당시에는 이 계단이 피난로로 활용되지 못했다. 양쪽 출입구로 향하는 복도 통로가 화염에 의해 차단돼 피난이 불가했을 것이라는 게 소방의 판단이다.


양쪽에 계단은 있었지만 두 계단 사이에 있던 화물용 엘리베이터 통로로 화염과 연기가 유입되면서 피난로가 가로막혔고 이로 인해 외부 탈출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내부와 외벽 구조물로 쓰인 샌드위치 패널로 착화된 불길과 유독가스가 퍼진 것도 피해를 키운 요인으로 꼽힌다. 당시 2층에 있던 인부들은 급격하게 확산한 농연 탓에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시안화수소와 일산화탄소 등 유독가스를 흡입한 뒤 질식해 쓰러진 것으로 추정된다.


시안화수소는 우레탄 100g이 연소할 때 약 420ppm이 형성된다. 보통 27ppm이 치사 농도인 점을 감안하면 화재 당시에는 단 한 모금으로도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사고서 드러난 과제들, 정부는 어떻게 풀까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와 판박이 사고를 겪은 정부는 재발 방지대책에 고심 중이다. 2017년 12월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와 2018년 1월 밀양 화재사고를 겪은 뒤 2019년부터 추진한 범정부 화재안전 특별대책도 무색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사실 이번 화재의 특성은 2019년 추진한 화재안전 특별대책으로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주택이나 고시원, 다중이용시설 등 기존 건축물을 중심으로 대책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이번처럼 건축 공사가 진행되는 건설현장에서의 화재대책은 사실 별개의 일이었다.


유사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건설현장에서 잇따르는 화재사고에 초점을 둔 대책이 절실한 상황이다. 정부 역시 건설현장 화재사고를 줄이기 위한 근원적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가연성 건축 자재 화재 안전성 강화 = 우선 건축 기준을 담당하는 국토교통부는 가연성 건축 마감재 기준을 강화하는 등 건축자재의 화재안전 성능을 확보해 나가기로 했다. 사실 이 대책은 대형화재 때마다 거론되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게 사실이다. 제도개선 추진 과정에서 또다시 건축자재 생산 업계의 경제성 논리에 후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대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토부가 구상하는 관련 대책에 따르면 일정 규모 이상의 공장이나 창고에만 적용되는 마감재 화재안전기준을 소규모 공장이나 창고까지 확대한다. 샌드위치 패널을 마감재로 사용할 땐 준불연 이상 성능을 확보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내단열재에 대한 화재안전기준도 새롭게 마련해 나갈 방침이다. 지금까지 내단열재에 대해서는 화재안전가준을 적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토부는 앞으로 난연성능 이상으로 관련 기준을 강화하고 건축 심의 등을 통해 대체공법을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다.


난연성능 미만의 마감재 사용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최소한 자기 소화성을 확보하도록 하고 마감재료 공사 중 전담감리를 배치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마감재에 대한 건축 자재 제조와 품질관리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품질인정제도 도입도 추진하기로 했다.

 

화재위험 작업 안전관리 대책 추진 = 공사현장에서 발생하는 화재사고를 줄이기 위한 위험작업의 안전관리도 강화한다. 화재나 폭발 위험작업의 동시 진행을 금지하는 방안과 가스경보기ㆍ환기장치 설치를 의무화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가연성 물질 취급작업과 화기 취급작업이 동시에 이뤄지면서 폭발사고로 이어지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고용부는 위험작업 동시 작업 금지를 위한 규정 개선을 진행하고 국토부는 감리 담당자에게 공사중지 권한을 신설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소방청은 시공 중인 건축물에 유증기 감지를 위한 가스 경보기 설치를 의무화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또 인화성 물질 취급작업 시 강제 환기장치 설치를 의무화하고 이 같은 화재예방 장치에 대한 설치비용을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소방청은 시공 중인 건축물에도 화재안전관리자 선임을 의무화는 내용을 담은 ‘공사장 화재안전기준’을 제정하기로 했다.


특히 국토부는 공공과 민간공사에 모두 적용되는 ‘건설안전특별법’ 제정을 검토 중이다. 건설사업의 단계별로 사업 주체의 안전관리 역할과 책임을 규정하기 위해 안전을 위한 별도 특별법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계획단계와 설계, 시공에 있어 필요한 안전관리 방안을 법률에 규정하는 내용을 이 법률에 반영해 안전관리에 문제가 발생하면 공사중지와 재발대책을 수립하고 공사를 재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화재위험 공사현장 관리ㆍ감독 강화 = 고용부는 공염불에 그쳤다는 지적을 받은 유해위험방지계획서가 실제 현장에서 작동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건설현장 기술지도 시스템으로 구체적인 위험현장과 작업 시기 등을 파악해 위험 요인을 줄이는 게 목표다.


유해위험방지계획서 제출 대상에 미달하는 중소규모 현장에 대해서는 용접이나 용단, 미장 방수, 절단 작업 등 위험작업에 대해 신고할 수 있도록 하는 신고제 신설도 검토하고 있다.


건설근로자의 정보 파악을 위해 전자정보 활용 방안과 빅데이터를 구축하는 대책도 추진하기로 했다. 용접과 같이 화재 위험이 있는 작업 진행 근로자의 현장 위치를 파악하고 현장 지도와 감독을 위한 빅데이터화를 통해 고위험 사업장과 취약시기 등을 파악한 후 지도와 감독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이다.


화재위험 사업장의 점검과 감독 강화 방안으로는 민간 감시 체계를 확대하는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 건설 분야 경력자와 퇴직자 등 민간인력을 채용해 순찰을 대폭 확대하는 한편 지방자치단체가 현장 지도 등을 진행할 수 있도록 관련 법을 개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