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향식 피난구 아니죠. 하향식 피난기구 맞습니다!"
국토해양부, 재해취약자는 보건복지부로
대피공간 ‘탈출장소가 아닌 대피 대기장소’
중심 잃은 국토해양부
▲ 논란이 되고 있는 발코니에 설치된 하향식 피난구 | | 아파트 발코니 확장으로 사회적 논란거리를 제공했던 국토해양부가 이번에는 제대로 일을 냈다. 국토해양부가 아파트 공동주택의 대피공간인 방호구획에 대한 면제를 주요 골자로 하는 법령을 새롭게 신설하면서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건축법시행령 제46조 5항으로 아파트 4층 이상인 층에서 발코니에 다음 각 호와 같은 구조를 설치한 경우에는 대피공간을 설치 아니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내용은 인접 세대와의 경계벽이 파괴하기 쉬운 경량구조 등인 경우와 경계벽에 피난구를 설치한 경우, 발코니의 바닥에 국토해양부령으로 정하는 하향식 피난구를 설치한 경우이다.
여기서 문제시 되고 있는 부분은 발코니의 바닥에 하향식 피난구를 설치할 경우 면제 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화재발생에 따른 대피공간이 없어지고 하향식 피난구가 범죄에 악용될 수 있는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국토해양부가 지정하고 있는 하향식 피난구는 덮개와 사다리, 경보시스템을 갖춘 구조로 발코니 바닥에 설치된 사다리 덮개를 열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재해취약자인 장애우나 노약자의 경우 피난이 용이하지 못하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는 지난 4월 29일 관련법에 대해서 장애인을 이용할 수 없는 시설만으로도 충족하도록 하여 장애인을 차별하고 있다고 규정하면서 법개정을 요구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연합회 관계자는 “하향식 피난구만 있으면 별도의 대피공간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고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비장애인은 아래로 피난하고 장애인은 어떻게 되든 모르겠다는 처사”라며 성토했다.
또 “전동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나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은 하향식 미끄럼(사다리) 피난구를 이용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어 하향식 피난구는 중증 장애인이 이용할 수 없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국토부의 관계자는 “법령을 개정할 때 재해취약자 이용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법령을 신설하게 됐다”고 인정하면서도 “국토부는 장애인들을 위해 주거공간의 문턱을 없애느냐 마느냐 하지 않으며 장애인 편익증진법에서 다뤄져야할 사항”이라고 일축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8조에 따르면 시설물의 소유ㆍ관리자는 장애인이 당해 시설물을 접근ㆍ이용하거나 비상시 대피함에 있어서 장애인을 제한ㆍ배제ㆍ분리ㆍ거부하여서는 안된다고 규정해놓고 있다.
아울러 국토해양부는 대피공간 설치 면제와 관련한 제46조 5항을 금년 2월 18일 신설했지만 소방방재청과 협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최근 신설된 하향식 피난구 구조에 관한 기준도 4월 7일 신설한 이후인 15일 관계부처에 의견조회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법령에 화재안전에 따른 하향식 피난기구가 아닌 하향식 피난구로 정해놓은 것도 의도적인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피난기구와 동일한 구조인 덮개와 사다리, 경보시스템을 갖춰놓고도 피난기구가 아닌 ‘하향식 피난구’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북대학교 김화중 교수는 국내 방화규정에 따른 건축물 방화구획 성능 및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라는 제하의 논문을 통해 화재안전이라는 하나의 목표달성을 위해 양대 법규정인 건축법 및 소방법이 공존하고 있지만, 양대 법령 및 행정의 유기적 협력의 공백으로 인해, 행정력의 손실, 안전성 확보의 미흡, 일선 산업체의 혼선 등 다양한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건축(국토해양부) 및 소방(행정안전부)의 상설 협의 기구체의 설치 운영이 무엇보다 필요한 실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소중한 가족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 아파트 화재 관련사진으로 본 내용과는 무관함 | | 소방방재청에서 발표한 2008년 화재통계 연감을 보면 공동주택인 아파트 및 주상복합아파트, 연립주택, 다세대주택 등에서 발생한 화재건수는 4,737건으로 집계됐다. 이중 아파트 화재가 2,956건으로 가장 많았고 화재발생으로 인한 사망자도 41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공동주택 화재는 1976년부터 거의 완만하게 매년 증가 경향을 보여왔으며 1998년 1,953건(5.7%) 발생을 기점으로 감소와 증가를 반복하면서 5%대의 점유율을 나타내다 2008년에는 4,373건으로 9.54%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지난 2002년부터 2006년까지 공동주택에서 발생한 화재에 따른 연령별 사망ㆍ부상자 발생 현황을 보면 61세 이상 노인의 사망이 33.8%, 부상자 26.3%로 전체 화재에 의한 사망자의 24.1%, 부상자의 15.6% 보다 압도적이다. 건강한 성인에 비해 화재에 대응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화재발생 시간대별로는 01시에서 03시가 사망자 수가 높았고 다음으로 23시에서 01시, 03시에서 05시 순으로 분포도를 보여 취침시간 이후에는 무방비 상태에 놓여 속수무책으로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파트 공동주택은 일반주택과 달리 피난방향이 계단실로 이어지는 한 방향 밖에 없어 계단실에 연기가 가득차면 피난경로가 차단되어 피난이 어렵고 설상 화재발생을 인지하고 깨어있다고 해도 인명피해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정부는 2005년 12월 2일부터 아파트로서 4층 이상인 층의 각 세대가 2개 이상의 직통계단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 발코니의 경계벽을 뚫고 옆집으로 대피하거나, 방화문이 설치돼 있는 대피공간에서 1시간동안 구조를 기다릴 수 있도록 2㎡ 이상의 전용 대피공간, 3㎡공용 대피공간을 설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대피공간은 화재시 상층으로의 연소확대방지와 피난을 위한 생존공간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화재발생에 따른 안전확보 측면이 강하지만 차열방화문이 아닌 비차열방화문을 설치할 수 있도록하여 열을 차단하지 못하는 문제점과 고가사다리차의 접근성을 의무화하지 않아 구조 지연의 문제점 등으로 인하여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따른다.
한국사이버대학교 소방방재학부 박재성 교수는 초고층건물의 피난안전 성능개선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초고층건축물의 피난안전성 측면에서의 취약요인과 개선방안’이라는 발제를 통해“대피공간은 대피를 하기 위한 대기장소이지 탈출장소가 아니며 구조지연시에는 연기로 인한 질식 위험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제도적 측면에서 개선방안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대피공간에 설치된 진입문은 발코니와 대피공간의 구획을 정하는 문으로 대피공간 안에서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없고 문의 틈새를 통해 유독성 가스가 침입할 수 있어 심각한 위험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피난기구협회 이호 상임이사는 하향식 피난구를 자동차에 비유하며 “자동차가 편리성이 있는 반면 사고의 위험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전하면서 “모든 제도가 완벽하지 않듯이 하향식 피난구가 제약적이면 있어도 위급한 상황에서는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고 제품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시공자들이 대피공간의 인식부족으로 보일러실, 실외기실, 세탁실 등의 공간으로 시공됨에 따라 대피공간의 의미가 변색되어 버렸다.
▲ 좌)대피공간 우)대피공간을 창고로 이용하고 있는 사례 | | 또한 사용자들의 대피공간에 대한 인식부족도 대피공간에 대한 무용성을 더하는 데 한 몫하고 있다. 사용의 편의성을 위하여 잡다한 물건을 쌓아놓는 창고로 활용하는가 하면 심지어 발코니 공간 확보를 위해 철거해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반면 대피공간의 문을 2도어로 하는 곳도 눈에 띄고 있다. 현재 서울 세곡지구에 신축 중인 아파트의 경우 발코니에서 대피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과 대피공간 안에서 아파트 외벽으로 창문을 달아 외부의 공기가 대피공간 안으로 유입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2중으로 해놓았다.
경제성 & 안전성
대형 건설사인 시공사들이 공사비 절감과 발코니 공간 확장을 위해 대피공간을 없애고 시공비가 저렴한 하향식 피난구 설치로 선회할 것이라는 소방기술인들의 예측이 앞선다.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예측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하향식 피난구 설치에 따른 대피공간 예외규정이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한 방안으로 마련되었다는 주장만으로도 귀가 솔깃하다.
분양면적에 확장된 발코니 면적을 포함시켜 이윤을 고스란히 챙겨가는 부도덕한 일부 건설사들의 관행을 볼 때 경제성 때문에 대피공간을 없애는 방안이 연구됐다는 말이 그리 신빙성 없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진국처럼 건축물의 용도와 규모 및 재실자수, 공간특성에 따라 성능적 관점에서 설계되고 시공되기 보다는 면적구획 중심으로 공간의 화재특성을 세심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우리 사회가 인명의 소중함 보다는 경제성을 우선시하고 있다.
금성소방산업(주) 조용선 소방기술사는 “보다 안전한 피난의 안정성을 위하여 현재의 대피공간에 차열방화문 적용하고, 대피공간마다 고가사다리차의 접근성을 확보하며, 외벽으로 창문을 두어 외부공기 유입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피난의 신뢰성을 보다 확보하고자 한다면 대피공간 내의 바닥에 하향식 피난구를 설치하고, 사생활 침해 방지를 위하여 방화문에 시건장치를 설치한다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현재 10층이하에만 완강기 등을 적용하는 피난개념이 11층이상의 고층건축물에도 확대되는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말했다.
최근 서울시 건축심의위원회는 뚝섬3구역 복합빌딩 심의와 관련해 계단실의 안정성확보를 위해 최소 2개소 이상의 원칙을 적용했다. 또 세대별로 아래층 세대로 통하는 고정식 또는 접철식 사다리를 반드시 생존공간인 대피공간 안에 설치하도록 규정해 놓았다.
이외에도 KOTRA 외국인 창업지원센터도 대피공간 내에 하향식 피난사다리를 설치해 화재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처럼 건축물의 화재 및 피난안전을 목적으로 성능설계, 화재영향평가, 초고층 및 지하공동 시설에 대한 소방 관련법이 활발하게 제정되고 시행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일반 정상인을 기준으로 법안이 마련되고 있어 재해취약자인 노약자나 장애우에 대한 안전대책이 미흡한 실정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지난 2000년부터 성능설계를 시행하면서 초고층화?대형화 등의 대규모 건축물들을 성능적으로 설계하는 방안을 마련하였고 고령자들만 재실하고 있는 노인복지시설에 대한 성능적인 화재안전설계를 도모하는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재해약자 방재대책으로서 재택재해약자대책, 사회복지시설 등의 재해약자대책, 외국인의 안전확보대책 등의 방안을 마련해 놓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의 현실은 암담하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향후 2018년에는 고령화 인구가 14.3%로 늘어나고 2026년에는 20.8%로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지만 건축물의 피난계획시 고령자의 피난안전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나라가 OECD 회원국 30개국 가운데 경제성장률이 높은 상위그룹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복지적인 측면에서 행복지수는 25위로 최하위 그룹에 속하는 것을 볼 때 재해취약자를 먼저 배려하는 세상이 보다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첩경은 아닌지 정책입안자들의 진정성을 촉구해본다.
※ 다음 호에서는 각계 전문가들의 입장과 의견을 종합해 게재합니다.
김영도 기자 inheart@fpn11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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