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초고층에 산다는 것 ‘인공재해’ 각오
ㆍ빌딩풍·열대야·환경오염물질 쉽게 노출 ‘대책 무방비’
지난 10월 1일 부산에서 발생한 38층짜리 주상복합아파트 화재 이후 초고층 아파트의 주거환경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번에 드러난 ‘소방 사각지대’는 물론이고 열섬현상에 의한 고온, 빌딩 사이의 돌풍, 오염물질 누적, 일조권 피해 등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높을수록 집값은 상승한다’는 부동산업계의 감언이설과 달리 층이 올라갈수록 주거환경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몇년새 초고층 아파트를 둘러싼 환경문제는 ‘돌풍’이 됐다. 이규석 성균관대 조경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08년 11월 29일 수도권에 강풍 특보가 내려졌던 날 북한산 중턱 해발 455m에 있는 ‘승가사 측정소’의 순간 최대풍속은 초속 11.9m로 등산객들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같은 시간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서울 강남의 한 지점에서는 초속 18.9m의 바람이 측정됐다. 작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위력으로, 이곳에서는 이후에도 초속 19m를 웃도는 바람이 불어댔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서울의 고층빌딩이 바람의 세기를 바꾼 것”이라고 분석한다. 도심 상공의 강한 바람이 빌딩과 빌딩 사이의 좁은 공간을 통과하면서 풍속이 급격하게 높아져 심할 경우 태풍과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부산 해운대 화재가 순식간에 고층까지 번진 것이나 지난 9월 2일 곤파스가 우리나라를 강타했을 때 서울 도심의 초고층 빌딩 주변 수천 그루의 가로수가 뽑히거나 부러진 것도 이와 같은 현상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일조권 분쟁·화재대책 걸음마 수준
학계에서는 이를 ‘빌딩풍’ 또는 마릴린 먼로의 치마를 들춘 지하철 환기구 바람에 빗대어 ‘먼로풍’이라고 부른다. 이규석 교수는 “강남의 주상복합단지에 부는 빌딩풍에 의해 보행하기가 불편해지고, 길가에 세워둔 오토바이가 넘어지기도 한다”며 “미국에서는 고층건물 주변의 순간 돌풍에 의한 노인들의 낙상사고가 빈발하자 빌딩풍에 대해 규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초고층 아파트가 밀집한 서울 도곡동에서 만난 한 상인은 “이 동네 매장이 가판을 펼치지 않는 이유를 아느냐?”며 “미관에 대한 고려도 있지만 갑자기 불어닥치는 돌풍 탓에 물건이 날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고층건물을 지을 때는 높이(100m 이상)와 일정 연건축면적 조건 중 하나에 해당하면 반경 500m에 대한 빌딩바람 영향평가가 의무화돼 있다. 독일 등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초고층 아파트에서 겪는 폭염과 열대야 현상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규석 교수가 2008년 3월 16일부터 2009년 3월 15일까지 서울 강남지역 초고층 아파트와 주변 6곳의 기온 추이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초고층 아파트의 열대야 일수는 연간 13일로 인근 학교의 5일, 도시 야산의 3일, 도시 하천의 1일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건물 사이가 좁고 건물이 높을수록 연평균 기온이 높고 열대야 발생이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평균 기온은 55층 초고층 아파트 13.3도, 이를 둘러싼 25층 아파트 13.0도, 9층 아파트 12.8도, 5층 학교 12.7도, 5층 주거용 건물 12.2도, 도시 야산 12.1도, 도시 하천 12.0도를 기록했다. 측정지점 7곳의 연평균 기온이 건물 높이와 정확히 반비례한 것이다. 이 교수는 “초고층 아파트는 건물 자체가 통유리라 여름엔 사우나와 다름없다”며 “상공풍 때문에 안전상 창문을 15도 이상 열지 못하면서 환기가 안돼 음식냄새가 심하고 곰팡이가 생기는 일도 있지만 집값 때문에 쉬쉬하는 게 초고층 아파트 입주민들의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관련법규 시행 세칙없어 유명무실
열섬현상과 함께 심각한 것은 초고층 빌딩이 밀집돼 있을 경우 오염물질이 초고층 빌딩 사이에 막혀 외부로 소산되지 못하고 침적된다는 것이다. 2005년 5월 환경부는 강남 주상복합단지의 발암물질 베넨 오염농도가 3.52ppb로 공장지대인 경기도 안산시 정왕동보다도 높게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이는 유럽과 일본 기준의 3~4배를 초과하는 수치다.
이번 부산 해운대 화재는 화재에 취약한 설계와 외장재, 화재 대응시스템 부재, 고층 화재 진압의 기술적 어려움 등 화재에 무방비 상태인 국내 초고층 건축물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다행히 대낮 화재로 큰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4층에서 발생한 불이 불과 10여분 만에 꼭대기층까지 순식간에 번지면서 ‘한국판 타워링’의 공포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초고층 빌딩의 경우 화재 대책은 초보 수준”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초고층 빌딩 화재의 특징은 고층일수록 불길이 상승기류를 타고 급속하게 번지는 ‘굴뚝효과’가 강하게 일어난다는 것.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불길이 번지면 피난 통로의 바람 속도가 30배 빨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초동 진화’가 중요하지만, 초고층 빌딩 자체의 소방시설이나 소방방재청의 장비는 턱없이 부실하다는 지적이다. 이번 화재에서도 일반 소방차는 무용지물이었고, 펌프차의 살수 범위는 15층 높이가 한계였다. 또 고층화재 진압에 쓰이는 굴절사다리차나 고가사다리차도 20층 이상에선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헬기가 출동하거나 옥상에서 로프를 연결해 구조작업을 펼쳐야 하지만 초고층 아파트는 바람의 영향을 받기 쉬워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박형주 경원대 소방시스템관리학과 교수는 “초고층 건물은 단순한 빌딩이라기보다는 수직으로 세워진 도시”라며 “대형화재가 발생했을 때 스크링클러는 단순히 화재를 지연시키는 도구일 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패닉현상. 박 교수는 “초고층 빌딩에서 5분 이상 피난이 지연되면 피난자들이 피로를 느끼고 패닉에 빠져 압사사고 같은 게 일어나기 쉽다”며 “실질적 방재·재난 대책을 제도화하고, 주민들을 철저히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초고층 빌딩의 경우 피난층은 필수라는 목소리다. 피난층은 화재가 났을 때 대피공간을 갖춘 곳으로, 이곳에는 1층이나 옥상으로 바로 오갈 수 있는 계단과 비상급수시설 등을 갖춰야 한다. 해외에서는 피난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소방대원이 진입하거나 건물 내에 있는 사람들이 피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중국은 100m 이상 건물에는 15층마다, 홍콩은 20∼25층마다 피난안전구역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타이베이 101빌딩도 8층마다 피난안전구역을 두고 있지만 국내에는 적용된 곳이 없다.
초고층 아파트 건축 관련 법규도 제자리걸음이다. 정부는 이미 건축법 시행령에 초고층 빌딩에 대해 30개 층마다 피난안전구역을 설치하도록 해놓고도 설치기준 시행규칙은 만들지 않아 유명무실한 상태다. 이번 정기국회에서도 피난층 설치 등을 담은 ‘초고층 및 지하연계 복합건축물 재난관리에 관한 특별법’이 상정되어 있지만 새로 허가 나는 50층 이상 빌딩에만 적용하고 있어 고가사다리차가 닿지 않는 30~49층 고층 빌딩과 법안 적용 이전에 이미 지어진 초고층 빌딩 등은 ‘사각지대’에 있다는 지적이다.
일조권 또한 초고층 아파트를 둘러싼 오랜 분쟁거리다. 이는 아파트 단지 주변 주민들과의 불화뿐만 아니라 같은 단지 내에서도 초고층이 만들어낸 그늘 탓에 입주민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지적이다. 이규석 교수는 “독일은 보쿰 등 일부 주에서 높이 20m 이상의 건물에서 특히 어린이들이 살지 못하게 강력히 권고하는 등 고층건물을 주거용이 아닌 낮에만 머무르는 상업용 건물로 제한하고 있다”며 “우리는 지나치게 밀집돼 있어 일조권에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또한 가장 높은 요코하마 랜드마크타워(296m)부터 25위의 산뇨빌딩(194m)까지 모두 상업용 건물이며, 미국에도 뉴욕 맨해튼의 고층 아파트들이 있지만 대부분 주중에만 머무르는 집무 겸용 개념을 지닌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환경평가·장기 도시계획 철저해야
세계초고층학회(CTBUH)는 초고층 빌딩을 50층, 220m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국내의 초고층 빌딩은 39곳. 현재 공사 중인 51곳과 허가가 나거나 설계 및 추진 중인 건축물 등을 포함하면 2016년에는 총 125개의 초고층 건축물이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건축업계에서는 초고층 빌딩, 특히 초고층 아파트의 출현을 인구의 대도시 집중화 현상에서 찾는다. 대도시 집중화가 심화할수록 건축물의 양식이 대형화·복합화되는 추세라는 설명이다. 특히 고용 및 인구유입 효과, 인근 주거지 가치상승 등 다양한 파급력을 갖는다는 게 부동산 업계의 주장이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국내 신규 초고층 아파트 개발사업은 주춤한 상태다.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초고층 아파트인 타워팰리스의 집값도 꼭지점 대비 30% 가까이 빠졌다.
문제는 고층 주거문화가 그 안에 사는 거주민뿐 아니라 주변에 심각한 환경영향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환경영향평가가 형식에 그치고 있어 갈수록 초고층 아파트와 관련한 문제는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규석 교수는 “정부가 지난 10년간 상업용지에 주상복합이라는 편법 주거용 건물을 허가해 건설사의 이익을 보장하는 도시정책을 시행한 결과, 도시 내 고층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다”며 “좁은 땅에서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고 싶다 보니 기형적인 초고층 주상복합이 건설되는데, 과연 초고층 주거건물이 적합한 주거환경인지 심각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사비만 수조원에 이르는 초고층 빌딩이 애물단지가 되지 않으려면 주변 환경영향 평가와 함께 장기적인 도시계획과 정밀한 수급 예측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지난 10월 1일 부산에서 발생한 38층짜리 주상복합아파트 화재 이후 초고층 아파트의 주거환경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번에 드러난 ‘소방 사각지대’는 물론이고 열섬현상에 의한 고온, 빌딩 사이의 돌풍, 오염물질 누적, 일조권 피해 등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높을수록 집값은 상승한다’는 부동산업계의 감언이설과 달리 층이 올라갈수록 주거환경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초고층 건물의 위신이 떨어지고 있다. 열섬현상, 빌딩풍, 오염물질 누적, 대형 화재시 속수무책, 일조권 포기 등 주변 환경 피해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서울 도곡동 초고층 아파트 전경. |경향신문사
최근 몇년새 초고층 아파트를 둘러싼 환경문제는 ‘돌풍’이 됐다. 이규석 성균관대 조경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08년 11월 29일 수도권에 강풍 특보가 내려졌던 날 북한산 중턱 해발 455m에 있는 ‘승가사 측정소’의 순간 최대풍속은 초속 11.9m로 등산객들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같은 시간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서울 강남의 한 지점에서는 초속 18.9m의 바람이 측정됐다. 작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위력으로, 이곳에서는 이후에도 초속 19m를 웃도는 바람이 불어댔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서울의 고층빌딩이 바람의 세기를 바꾼 것”이라고 분석한다. 도심 상공의 강한 바람이 빌딩과 빌딩 사이의 좁은 공간을 통과하면서 풍속이 급격하게 높아져 심할 경우 태풍과 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부산 해운대 화재가 순식간에 고층까지 번진 것이나 지난 9월 2일 곤파스가 우리나라를 강타했을 때 서울 도심의 초고층 빌딩 주변 수천 그루의 가로수가 뽑히거나 부러진 것도 이와 같은 현상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일조권 분쟁·화재대책 걸음마 수준
학계에서는 이를 ‘빌딩풍’ 또는 마릴린 먼로의 치마를 들춘 지하철 환기구 바람에 빗대어 ‘먼로풍’이라고 부른다. 이규석 교수는 “강남의 주상복합단지에 부는 빌딩풍에 의해 보행하기가 불편해지고, 길가에 세워둔 오토바이가 넘어지기도 한다”며 “미국에서는 고층건물 주변의 순간 돌풍에 의한 노인들의 낙상사고가 빈발하자 빌딩풍에 대해 규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초고층 아파트가 밀집한 서울 도곡동에서 만난 한 상인은 “이 동네 매장이 가판을 펼치지 않는 이유를 아느냐?”며 “미관에 대한 고려도 있지만 갑자기 불어닥치는 돌풍 탓에 물건이 날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고층건물을 지을 때는 높이(100m 이상)와 일정 연건축면적 조건 중 하나에 해당하면 반경 500m에 대한 빌딩바람 영향평가가 의무화돼 있다. 독일 등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초고층 아파트에서 겪는 폭염과 열대야 현상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규석 교수가 2008년 3월 16일부터 2009년 3월 15일까지 서울 강남지역 초고층 아파트와 주변 6곳의 기온 추이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초고층 아파트의 열대야 일수는 연간 13일로 인근 학교의 5일, 도시 야산의 3일, 도시 하천의 1일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히 건물 사이가 좁고 건물이 높을수록 연평균 기온이 높고 열대야 발생이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평균 기온은 55층 초고층 아파트 13.3도, 이를 둘러싼 25층 아파트 13.0도, 9층 아파트 12.8도, 5층 학교 12.7도, 5층 주거용 건물 12.2도, 도시 야산 12.1도, 도시 하천 12.0도를 기록했다. 측정지점 7곳의 연평균 기온이 건물 높이와 정확히 반비례한 것이다. 이 교수는 “초고층 아파트는 건물 자체가 통유리라 여름엔 사우나와 다름없다”며 “상공풍 때문에 안전상 창문을 15도 이상 열지 못하면서 환기가 안돼 음식냄새가 심하고 곰팡이가 생기는 일도 있지만 집값 때문에 쉬쉬하는 게 초고층 아파트 입주민들의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관련법규 시행 세칙없어 유명무실
열섬현상과 함께 심각한 것은 초고층 빌딩이 밀집돼 있을 경우 오염물질이 초고층 빌딩 사이에 막혀 외부로 소산되지 못하고 침적된다는 것이다. 2005년 5월 환경부는 강남 주상복합단지의 발암물질 베넨 오염농도가 3.52ppb로 공장지대인 경기도 안산시 정왕동보다도 높게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이는 유럽과 일본 기준의 3~4배를 초과하는 수치다.
이번 부산 해운대 화재는 화재에 취약한 설계와 외장재, 화재 대응시스템 부재, 고층 화재 진압의 기술적 어려움 등 화재에 무방비 상태인 국내 초고층 건축물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다행히 대낮 화재로 큰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4층에서 발생한 불이 불과 10여분 만에 꼭대기층까지 순식간에 번지면서 ‘한국판 타워링’의 공포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초고층 빌딩의 경우 화재 대책은 초보 수준”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초고층 빌딩 화재의 특징은 고층일수록 불길이 상승기류를 타고 급속하게 번지는 ‘굴뚝효과’가 강하게 일어난다는 것.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불길이 번지면 피난 통로의 바람 속도가 30배 빨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초동 진화’가 중요하지만, 초고층 빌딩 자체의 소방시설이나 소방방재청의 장비는 턱없이 부실하다는 지적이다. 이번 화재에서도 일반 소방차는 무용지물이었고, 펌프차의 살수 범위는 15층 높이가 한계였다. 또 고층화재 진압에 쓰이는 굴절사다리차나 고가사다리차도 20층 이상에선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헬기가 출동하거나 옥상에서 로프를 연결해 구조작업을 펼쳐야 하지만 초고층 아파트는 바람의 영향을 받기 쉬워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박형주 경원대 소방시스템관리학과 교수는 “초고층 건물은 단순한 빌딩이라기보다는 수직으로 세워진 도시”라며 “대형화재가 발생했을 때 스크링클러는 단순히 화재를 지연시키는 도구일 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패닉현상. 박 교수는 “초고층 빌딩에서 5분 이상 피난이 지연되면 피난자들이 피로를 느끼고 패닉에 빠져 압사사고 같은 게 일어나기 쉽다”며 “실질적 방재·재난 대책을 제도화하고, 주민들을 철저히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월 1일 부산 해운대구 우동 마린시티 내 주거용 오피스텔인 우신골드스위트에서 불이나 연기가 치솟고 있는 가운데 소방헬기가 물을 뿌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 때문에 초고층 빌딩의 경우 피난층은 필수라는 목소리다. 피난층은 화재가 났을 때 대피공간을 갖춘 곳으로, 이곳에는 1층이나 옥상으로 바로 오갈 수 있는 계단과 비상급수시설 등을 갖춰야 한다. 해외에서는 피난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소방대원이 진입하거나 건물 내에 있는 사람들이 피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중국은 100m 이상 건물에는 15층마다, 홍콩은 20∼25층마다 피난안전구역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타이베이 101빌딩도 8층마다 피난안전구역을 두고 있지만 국내에는 적용된 곳이 없다.
초고층 아파트 건축 관련 법규도 제자리걸음이다. 정부는 이미 건축법 시행령에 초고층 빌딩에 대해 30개 층마다 피난안전구역을 설치하도록 해놓고도 설치기준 시행규칙은 만들지 않아 유명무실한 상태다. 이번 정기국회에서도 피난층 설치 등을 담은 ‘초고층 및 지하연계 복합건축물 재난관리에 관한 특별법’이 상정되어 있지만 새로 허가 나는 50층 이상 빌딩에만 적용하고 있어 고가사다리차가 닿지 않는 30~49층 고층 빌딩과 법안 적용 이전에 이미 지어진 초고층 빌딩 등은 ‘사각지대’에 있다는 지적이다.
일조권 또한 초고층 아파트를 둘러싼 오랜 분쟁거리다. 이는 아파트 단지 주변 주민들과의 불화뿐만 아니라 같은 단지 내에서도 초고층이 만들어낸 그늘 탓에 입주민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지적이다. 이규석 교수는 “독일은 보쿰 등 일부 주에서 높이 20m 이상의 건물에서 특히 어린이들이 살지 못하게 강력히 권고하는 등 고층건물을 주거용이 아닌 낮에만 머무르는 상업용 건물로 제한하고 있다”며 “우리는 지나치게 밀집돼 있어 일조권에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또한 가장 높은 요코하마 랜드마크타워(296m)부터 25위의 산뇨빌딩(194m)까지 모두 상업용 건물이며, 미국에도 뉴욕 맨해튼의 고층 아파트들이 있지만 대부분 주중에만 머무르는 집무 겸용 개념을 지닌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환경평가·장기 도시계획 철저해야
세계초고층학회(CTBUH)는 초고층 빌딩을 50층, 220m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국내의 초고층 빌딩은 39곳. 현재 공사 중인 51곳과 허가가 나거나 설계 및 추진 중인 건축물 등을 포함하면 2016년에는 총 125개의 초고층 건축물이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건축업계에서는 초고층 빌딩, 특히 초고층 아파트의 출현을 인구의 대도시 집중화 현상에서 찾는다. 대도시 집중화가 심화할수록 건축물의 양식이 대형화·복합화되는 추세라는 설명이다. 특히 고용 및 인구유입 효과, 인근 주거지 가치상승 등 다양한 파급력을 갖는다는 게 부동산 업계의 주장이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국내 신규 초고층 아파트 개발사업은 주춤한 상태다.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초고층 아파트인 타워팰리스의 집값도 꼭지점 대비 30% 가까이 빠졌다.
문제는 고층 주거문화가 그 안에 사는 거주민뿐 아니라 주변에 심각한 환경영향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환경영향평가가 형식에 그치고 있어 갈수록 초고층 아파트와 관련한 문제는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규석 교수는 “정부가 지난 10년간 상업용지에 주상복합이라는 편법 주거용 건물을 허가해 건설사의 이익을 보장하는 도시정책을 시행한 결과, 도시 내 고층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다”며 “좁은 땅에서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고 싶다 보니 기형적인 초고층 주상복합이 건설되는데, 과연 초고층 주거건물이 적합한 주거환경인지 심각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사비만 수조원에 이르는 초고층 빌딩이 애물단지가 되지 않으려면 주변 환경영향 평가와 함께 장기적인 도시계획과 정밀한 수급 예측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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