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및 재해

튀르키예 지진 7.8- Ⅵ

Dr.risk 2024. 4. 1. 20:58

KDRT, 하타이주 안타키아에 숙영지를 편성하다

달리는 버스 창으로 앞 좌석 대원의 얼굴이 비쳤다. 창밖 무너진 건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안타키아로 가는 그 시간만큼은 모두가 ‘한 명의 생존자라도 더 구조되길’ 바라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안타키아는 이스켄데룬에서 남쪽으로 약 63㎞ 떨어진 곳이다. 

 

버스는 다시 큰 산맥의 허리를 통과해 달리기 시작했다. 구글맵으로 약 1시간 55분. 대한민국 해외긴급구호대의 도움을 기다리는 최종 목적지다.

 

하지만 안타키아로 들어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어둠이 깔린 도로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미 모든 기능을 상실했고 커다란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지옥 문지기가 이름을 부르면 하나씩 차례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왕복 4차선 도로가 구급차 사이렌 소리로 가득 찼다.

 

버스 앞과 뒤, 반대편 차선으로 역주행하는 구급차를 보며 안타키아의 긴박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구급차의 파란색 경광등 빛에 비친 대원들의 얼굴에도 피곤함보다 긴장감이 가득해 보였다.

 

 
▲ 안타키아에서
나오는 구급 차량

 

구급차의 뒤를 따르면 빨리 갈 수 있다고 생각한 버스 기사가 차선을 바꿔 구급차 뒤에 따라붙었다. 도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구급차가 이동하는 길은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모세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생명의 소중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가 구급차 뒤를 따라 조금씩 움직이려고 할 때 누군가가 밖에서 버스 출입구를 손으로 두드리며 소리를 쳤다. 앞문을 밖에서 열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사에게 소리쳤다. 우린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버스 기사, 신분을 알 수 없는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대원들은 모두 긴장한 분위기였다. 순간 머릿속에 ‘이름 모를 사람이 더 위협을 가하면 제압해야 할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속설처럼 있는 힘껏 바락바락 악을 썼다. 어떤 말이 오갔는지 알 수 없지만 버스 기사의 말 한마디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코렐리”, “코레아” 

 

그때의 상황을 개인적 생각으로 풀어본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구급차가 먼저 가야 한다. 버스를 빼라” 

 

“한국 구조대다. 우리가 빨리 가야 사람을 구조할 수 있다” 

 

▲ 하타이 지방 헌병대 사령부(치안사령부) 정문

이처럼 몇 번의 소란과 버스 기사를 위협하는 상황도 있지만 무사히 지옥문을 지나 진짜 지옥에 도착했다. 이스켄데룬을 떠나 약 4시간 만인 오후 8시 30분께 우린 하타이 지방 헌병대 사령부(Hatay İl Jandarma Komutanlığı)1)에 도착했다. 이곳은 일명 하타이 치안사령부로도 불렸다.

 

안타키아는 어둠의 도시였다. 날이 어두워 지진으로 인한 주변 피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를 환영해 주는 행사도, 사람도 없었다. 이것이 재난 현장의 현실이었다. 

 

먼저 도착한 선발대는 치안사령부에 튀르키예 하타이주 안타키아 지역 지진 피해 대응을 위해 대한민국 해외긴급구호대가 왔다고 보고했다.

 

또 본대가 치안사령부 주둔지에서 저녁을 먹고 휴식할 수 있도록 조치해 뒀다(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하타이 치안사령부에서는 우리가 왜 왔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이후 선발대는 해외긴급구호대가 숙영할 수 있는 숙영지를 찾기 위해 출발했다. 

 

사회 기반 시설이 파괴돼 가로등 불빛도 없고 휴대전화도 잘되지 않았다. 간신히 잡히는 로밍 데이터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한동안 통신 사정이 좋지 않아 선발대와 연락이 두절되기도 했다. 서로의 안전이 걱정됐고 불확실한 현실에 답답했다.

 

치안사령부 공터에는 군인과 경찰, 재난ㆍ비상관리 당국(APAD)2) 사람들이 텐트를 쳐 놓고 숙영지를 편성한 후 구조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낯선 장소와 낯선 언어, 낯선 민족. 우리에게 유리한 것 하나 없는 튀르키예에서 식당을 찾기도 어려웠다.

 

주변에 있는 현지 관계자들이 친절하게 헬기장 인근에 마련된 이동식 트레일러 식당까지 안내해 줬다. 오전 3시께 기내식을 마지막으로 약 18시간 만에 튀르키예 전통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 치안사령부에 마련된 이동식 취사 트레일러


현지 구조 인력들과 한 줄로 서서 이동식 트레일러 배식대에 올랐다. 얇은 스티로폼 식판을 제일 먼저 들고 수저를 챙긴 후 잘라놓은 바게트 빵, 구워놓은 난(빈대떡류), 콩으로 만든 수프, 볶음밥을 배식받았다.

 

배식하는 현지인들은 우리가 신기한듯 계속 지켜봤다. 식탁이 별도로 준비돼 있지 않아 헬기장 패드 옆에 모여 각자 식판을 손바닥으로 받치고 서서 식사를 했다. 

 

▲ 튀르키예에서 첫 식사

 

일부 대원은 향신료 향이 강해 먹지 않았다. 일부는 바게트 빵과 난만 먹고 콩 수프와 볶음밥은 버리기도 했다. 전통 콩 수프와 볶음밥은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았다. 이곳에선 우리가 외국인이니 튀르키예 음식이 입에 맞을 수 없었다. 

 

춥고, 배고프고, 만감이 교차했지만 우리의 임무가 명확한 이상 다른 생각은 접어 두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을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현지인을 만나 화장실까지 안내받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지진으로 사회 기반 시설이 파괴돼 전기는 물론 상수도도 사용할 수 없었다. 화장실 전등이 켜지지 않아 휴대전화 플래시를 밝히고 소변을 봤다. 대변기에는 볼일 후 물을 내리지 못해 똥으로 가득했다. 화장실에선 태어나서 처음 맡아 본 냄새가 났다. 

 

코를 막고 간단하게 볼일을 본 뒤 버스로 왔다. 버스 앞에는 식사를 마친 대원들이 모여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 불확실성에 대해 걱정했지만 경험 있는 선배들과 외교부가 있으니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다만 시간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계속 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오후 11시께 선발대에서 연락이 왔다. 

 

“치안사령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숙영지로 사용할 수 있는 학교를 발견했습니다” 

 

▲ 안타키아 최초 도착지와 숙영지 위치(출처 구글 지도)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죽음의 도시를 가로질렀다. 간혹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짙은 어둠 속에 별빛만이 어렴풋하게 건물임을 알 수 있게 해줬다. 

 

이 도시가 지진으로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도시의 처참함을 보지 않도록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버스는 조용히 멈췄다. 2023년 2월 9일 오전 1시께 대한민국 해외긴급구호대의 숙영지인 셀림 아나돌루 고등학교에 도착했다. 

 

▲ 셀림 아나돌루 고등학교(출처 snsal.meb.k12.tr/31/01/325983/okulumuz_hakkinda.html)

 

튀르키예 가지안테프 공항 도착 약 18시간, 한국 출발 약 30시간 만에 최종 목적지인 하타이주 안타키아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대한민국 해외긴급구호대의 활동을 시작한다. 숙영지에는 이미 튀르키예 재난관리국에서 일부 텐트를 설치하고 숙영하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 절반만 사용하세요. 앞으로 지원 인원과 장비가 더 들어올 예정이어서 더 내어 줄 공간이 없어요”

 

우린 최대한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 줬다. 숙영지를 설치할 장소가 협소하니 공간을 더 확보하는 게 최대 과제다. 숙영지를 편성하기 전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건물 안전 평가를 시행했다. 플래시로 학교 건물을 확인해 보니 갈라지거나 파손된 외벽은 없었다.

 

내부는 복도와 계단 벽 일부에 갈라짐이 있었다. 여진이 있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학교 건물 사용을 금지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라 화물을 실은 덤프트럭에서 무거운 장비를 내리는 게 부담됐다. 

 

이동식 조명등을 설치하고 하역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겐 지게차가 없었다. 적재된 장비를 사람의 힘으로만 내려야 했다. 덤프트럭을 학교 현관 출입구 계단 쪽으로 가깝게 주차한 후 계단의 높이를 이용해 가벼운 박스부터 내려 발판으로 깔고 무거운 장비들을 내렸다.

 

단잠에 빠져 있던 재난관리국 사람들이 우리가 어렵게 장비를 내리는 걸 보고 크레인을 가져와 하역을 도와줬다(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다).

 

▲ 야간 하역 작업

 

물류반 대원들의 지시에 따라 내린 장비와 물품을 분류하며 정리했다. 운영반 대원들은 운동장에 있는 작은 정자에 외교부, 소방청 상황 보고와 행정업무 지원을 위해 상황실을 구축했다. 종이박스 위에 노트북과 통신장비를 설치하고 발전기를 가동해 전기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화물 포장용 비닐랩을 이용해 추위를 이겨낼 수 있도록 외벽을 만들기도 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마무리될 무렵 가져온 즉석 식량을 먹을 수 있도록 보온물통에 작은 생수병 수십 개를 부어 물을 끓였다.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한 대원들이 일부 있었다. 사실 표현은 안 했지만 모두 배가 고팠다. 즉석 식량에 물을 부은 후 삼삼오오 모여 땅바닥에 앉아 식사했다. 

 

▲ 상황실을 설치하고 즉석 식량을 먹었다.

 

즉석 식량은 건조된 쌀, 라면 등이 들어 있는 작은 봉지에 물과 소스를 넣고 상부를 밀봉한 다음 발열팩이 들어 있는 큰 봉지에 넣고 물을 부으면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열이 발생한다. 그 열로 내부 작은 봉지를 가열해 뜨거운 밥이 된다. 

 

처음엔 끼니별 하나씩 먹다가 본격적인 구조 활동이 시작되고부터는 끼니당 2개 또는 즉석 식량 1개에 컵라면 1개로 식단이 맞춰졌다. 솔직히 외부에서 식사 대용으로는 참 좋은 제품이었지만 우리 대원들에겐 양이 부족해 보였다. 

 

장비와 물품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간단한 식사를 마치니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피곤함이 몰려와 행동도 느려지고 자고 싶은 욕구가 샘솟을 시간이다. 하지만 피곤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원들의 눈빛에는 ‘이제부터 시작이다’는 굳은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